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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010년 겨울 곰배령.

 2010년 한해 결산과 함께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곰배령을 찾았다. 곰배령... 곰이 배를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곳은 몇해전 방송에서 접한 이후 내도록 가보리라 맘 먹었던 곳중의 하나였었다. 한해 끝자락 유난히도 추운 12월 30일, 이곳은 그야말로 눈덮인 설국(雪國) 그 자체였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그곳 초입에 들어서니 온통 눈으로 뒤덮여 지나온 길과는 대조가 되는 풍광을 선보이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때묻지 않은 공기탓인지 절로 온 몸이 이를 즐겨 맞이하게 된다. 이 맘때 청학동을 찾았들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시리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 고즈넉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느낌. 그리고 이곳에서 한해의 묵은 찌꺼기를 걷어내고 새로이 또 한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느낌.

 여장을 푼 곳은 세쌍둥이네 풀꽃세상. 도시녀에서 곰배령 산골생활 17년여 하고 있는 이하영씨('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란 책을 내기도)가 세쌍둥이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었다.  도시에서의 삶과 다른 모습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가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깃들여진 곳이다. 그동안 이곳 이야기는 방송매체나 잡지등을 통해 바깥세상(?)에 많이 전해지기도 했었고 이로 인해 예전보다는 많은 외지인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처음 전파속에서 접했을 때번잡한 일상속에서 내내 동경하던 곳처럼 이곳 곰배령의 몇몇 삶들이  뇌리에 박힐 만큼 와 닿았던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또 이곳을 올해는 택했기도 했다.  없으면 없는대로 적게쓰면서 자연속에서 모든 것을 구하고, 계절의 운행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삶. 그것도 온전히 이곳에서 자란 이들이 아닌 도시에서 어느날 이곳에 정착한 몇몇 분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더더욱 그네들의 실제 삶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아예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기로 했다. 쉽사리 물어볼 수도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느 곳에 가던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 이곳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삶또한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택했기에 자연이 주는 혜택도 누리는 것이겠지만 이와 함께 예전에 누렸던 세속의 편리함에 대한 포기와 함께 더욱더 많은 부지런함등도 당연히 요구되고 있을 것이다. 
 곰배령 정상은 야생화가 8월경이면 지천으로 널린 국내에서 생태보존이 가장 잘 된 광활한 초원지대라고 한다. 야생화등을 즐길수는 없겠지만 아무도 없는 겨울 풍경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아이젠등을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강선마을을 지나서 곰배령 능선 초입까지 들어가니 무릎밑까지 푹푹 빠지는 길이 계속 이어졌다. 앞서간 발자국 하나(사진작가만 정상까지 허가를 해 줬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만 믿고서 계속 길을 챙겼지만 내도록 멀리서 보이는 곰배령 꼭대기 쪽은 바람에 날리는 눈발로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그 형상만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는 동안의 한겨울 바람도 매서웠지만 그곳은 더할 듯 했다. 

 12월 31일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 내내 계속 가고싶었지만, 정상까지 밟는 것은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입산허가를 받고서 세시간여 그곳을 즐긴 것만 해도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 속에서 만난 참나무 길은 또다른 운치를 선사하고 있었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모습이 서로가 하늘 높이 경쟁하듯이 고개를 빼려는 듯 하였다. 여름에 주는 풍광은 어떨까 하고 살펴보니 겨울과 여름이 주는 모습이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여름의 생명력, 싱그러움과 달리 묻 생명들이 다가올 이듬해를 준비하듯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어 내면서 나름 수양/자기 단련의 시절로 삼고 있는 듯 하기도 하고...
  곰배령을 갔다오는 그 시간을 빼고는 스님들이 동안거(冬安居)하듯 이틀 밤낮을 내내 준비해간 밀린 책들 읽어내며 보냈다. 틈틈이 이곳이 주는 깨끗한 겨울 바람을 맞보며 보낸 시간은 며칠 지나고 나니 벌써 추억같이 아련해지며 값지게 다가온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쉬움이 남아 잠시 들른 곳이 방태산. 한 겨울 인적도 없는 곳, 이곳 계곡가에서 끝없는 눈보라를 소리없이 맞으며 차가운 산골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겨울 소나무.  ' 내가 딛고 있는 이곳,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 길이 끊어졌다고 주저앉거나 돌아서지 않고 계속 뚜벅뚜벅 가는 것 ' 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한해가 가고 또 다른 새해가 밝아왔다.  

" 올곱게 뻗은 나무들 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 바로 흘러가는 물줄기 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바른 길 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면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