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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081222 : 서해안을 따라서 목포까지


 [이동경로]
 출발(13:30) → 15번 고속도로 → 송악 IC → 38번 국도 → 석문 방조제(15:00) 
 → 지방도   → 당진 IC → 해미 IC → 해미읍성(17:00) → 해미 IC → 15번 고속도로
 → 부안 IC(18:57) → 새만금 인근(늦어 위치 정확히 못찾음) → 23번 국도 → 줄포 IC
 → 15번 고속도로 → 목포 IC(21:09) → 숙소 (21:30)


  봉담을 거쳐 서해안 고속도로(15번)를 접어들어 얼마 달리지 않아 맞닿뜨리게 되는 
 서해대교. 평택과 당진사이에 놓인 7Km 가량의 교량으로 국내중 가장 긴 다리라고
 한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첨탑에서 내린 케이블로 다리하중을 지탱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다리자체는 강풍에도 견딜수 있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달리는 차에 와 닿는 바람의 세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다리 끝나기까지 차가
 요동을 함께 친다. 작년께 일어났던 수십중 추돌로 인한 교통참사의 현장...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조심스레 건넜다.

                                                      <서해대교>
  

  첫번째 방문지인 석문 방조제(防潮堤) .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서 목포까지의 일정을
잡던 중 중간 방문지로 새만금 방조제를 떠올렸고 기왕에 관련 방조제도 같이 보려고 일정에
추가 한 곳이다. 물론 이 때문에 정작 새만금 방조제는 결국 생략을 해야 했다.

 만조시에 바닷물이 육지에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안에 설치한 제방인 방조제는
그 역사가 짧지만은 않은 듯 하다. 가깝게는 일제시대부터 해서 조선, 고려시대까지 그
사례가 있다고 하니... 하지만 농업용지, 담수호 조성, 교통로등과 같은 효익대비 잃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의 손실이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사안이 아닐까 한다.

                                                   <석문방조제 배수갑문>

 이곳 방조제는 낚시 포인트로도 유명하다고 하지만 이 날은 날이 추워서인지 낚시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10여Km에 걸쳐서 이뤄진 물막이 제방. '제방 안과 밖의 단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석문방조제위>
 
 석문 방조제위에서 볼 때(위 사진 기준) 오른 편의 석문호. 방조제로 인한 담수호를 일컫는
듯 하다. 방조제 완공(87~95)이후 얼마나 많은 실익이 있었는지(기공때 필요성을 주창하던
그 사안들에만 국한해 볼 때) 따져 볼 필요는 없나 싶기도 하다. 모든일이 그러하지 않을까?
당대의 평가도(구축~적용) 중요하겠으나 이후(적용후 상당기간후) 평가도 제도나 인식의
측면에서도 당연시 되어야 할 것이다.

                                                           <석문호>


 다시금 돌아나와서 사업내용을 살펴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내용중에는 '석문 방조제
완공과 함께 내부 간척지 공사와 석문 국가공단이 완료되는 2000년대에는 살기좋고
선진화된 미래지향의 한국형 복지 농어촌이 건설될 것이다.' 과연 지금 그러한지?
아니면 아직 2000년대가 많이 남았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

(물론 인프라 측면에서의 필요성을 절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치의 문제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임. 우리의 농어촌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Hard적인 것들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지금 봉하마을에서 시도하는 것처럼 친환경 농법, 장군차등)

                                               < 석문 방조제 사업내용 소개>


 적어도 자연 환경의 변화를 크게 수반하는 사업의 경우는 현재와 미래시점, 물리적 경제와
비물질적 가치등 종합적인 분석/평가가 아주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방조제로 지역주민들도 한결 삶이 나아지고 또한 제방으로 인해 헤어진 조개가족
들 또한 변화된 환경에 그나마 적응하며 잘 살아가길 바란다.)

 두번째 방문지인 해미읍성. 벌써 시각이 오후 5시를 가리킨다. 날은 뉘엿뉘엿 어스름해지고
계획된 삽교천은 여기서 제하기로 하고 새만금만 들러보기로 맘을 먹음과 함께 입구로 들어
섰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서해안 왜구 방어를 위해 조선 태종~세종시절에 축조된 성.

                                                  <해미읍성 입구-진남문 전경>

 입구에 들어선 뒤, 뒷쪽을 보다가 눈에 뜨이는 붉은색 글이 누각 밑의 인방석에 새겨져
있다. 글씨체나 색깔등이 진남문의 전체 형태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서 눈여겨 보니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씌여져 있다.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명나라 연호인 홍치 4년
(신해년)에 만든 표식이라고 한다. 기분이 씁쓸해졌다.

                                                 <해미읍성 입구-진남문 후경?>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면 멀리 동헌이 보인다. 예전의 병마절도사나 현감겸영장이 집무를
보던 건물. 왼편에는 객사, 오른 편에는 옥사가 보인다.

                                                       <해미읍성-동헌전경>

 동헌으로 다가가니 옥사앞의 느티나무가 수백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무심히 서 있다.
옥사앞에 위치한 지라, 예사롭지 않아 보였는데 예전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
들을 끌어내어 매달아 고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은 그야말로 조선후기 병인양요,
대원군 부모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와 같이 외세의 조선 침탈이 서막을 올리던 그 때가
아니던가? 때마침 까치 한마리를 불러들여 쉬게끔 그 자리를 내 준다. 이제는 세월의 풍상과 함께 역사속의 온갖 오욕을 지켜봤으니 여유를 좀 찾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림이 너무 좋다.

                                         <해미읍성-회화나무와 옥사>

 동헌에 들어서면 동헌과 함께 뒷 쪽으로 책실과 부속사가 자리하고 있다. 때가 때(?)인지라
인적없이 적막하기만 하다. 책실과 부속사쪽에서 보는 굴뚝은 먼 옛날의 모습이 아닌 어릴적
작은 할아버지댁의 뒷마당을 떠올리게 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기게도 한다.

                                                <해미읍성-동헌, 책실/부속사, 내아>

 손님들이 오면 묵었다는 객사. 이곳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아의 대소관원들이
왕에 대한 예도 함께 올렸다고 한다.

                                               <해미읍성-객사>

 감나무 한 그루와 함께 방2칸, 부엌으로 이뤄진 민가. 정확하게 하면 서리의 집이라고 한다.
말단 관리정도가 되어야 이러한 마당과 집을 소유할 수 있었을 법도 하다. 그것도 성안이니.

                                                   <해미읍성-민가> 

 돌아 나오는 길에 진남문 쪽에서 바깥쪽과 안쪽의 성벽을 비교해 보았다. 바깥의 경우는 
높이가 5m 정도로 돌로 쌓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반면 안쪽의 경우는 낮은 평지와 구릉의
특성을 살림과 아울러 석벽을 지탱할 수 있도록 흙으로 완만한 경사로 채웠음을 알 수 있다.
(돌 또한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해미읍성-성벽>


 애초에 이번 여행을 계획함에 있어서 내심 '가보지 않은 곳' 그리고 '사전 예습'이 가장
큰 기준이었다. 여기서 사전 예습이라 함은 다음기회에 아이들과 함께 현장 견학시에 
좀 더 일러줄 내용에 대한 준비를 뜻하는 것이다. 그 뒤 일정인 삽교천은 관두고라도
새만금 만큼은 늦어도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래로 아래로 달렸다. 많이 일단 가보자!

 새만금 인근에 도착은 하였지만 길이 빙판이다. 아무래도 여기도 욕심을 좀 비우는게 
좋겠다. 미리 예습을 못해서 못내 서운하지만 '무리' 또한 삼가할 일이다.

 밤 9시께 목포에 도착했다. 숙소 잡기 위해 젊은이에게 좀 물어보니 상냥스레 답한다.
목포 냄새 물씬 풍기면서. ... ' 워메... 목포가 크덜 안어요. 여서 얼마 안 멀어부러요...' 라며
좋은 숙소 하나를 권해준다.  고맙다.

 숙소 들어서니 아줌마 또한 똑 같은 억양이다. ...' 어서 오셔잉...' (반갑소. 아짐)
 젊은 시절부터 가슴이 아련한 남도.  

'목포의 눈물' '유달산' 'DJ' '목포항' ...  둘러둘러 40년 너머서야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