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081224(수) : 소설 '태백산맥' 속의 벌교


 [이동경로]

    - 보성 출발(10:30) → 봇재 다원, 대한다업 보성다원 (10:50) → 2번 국도
    → 벌교(12:30) 
→ 태백산맥 문학관 → 점심:외서댁 꼬막(14:00) → 벌교읍내
    → 낙안읍성(16:00)
 → 광양 IC(17:00) → 12번 남해고속 국도 → 하동 IC → 하동
    → 쌍계사 → 악양
 → 최참판댁 (18:20) → 악양 → 지리산 청학동(19:40)
    → 자연산장(20:00)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벌교]

 소설 '태백산맥'은 1948년 늦가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제석 산자락에 자리 잡은 현부자네
제각 부근에서부터 시작하여 빨치산 토벌 작전이 끝나가던 1953년 늦은 가을 어느 날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픈 과거를 반추해 내고 있다. <참조 ☞ 1948~1953 역사>


 지식인 출신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하대치, 회의하는 지식인지지만 역사로부터 끊임없는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김범우, 이성적인 국군장교 심재모, 우익 청년단장 염상구,
손승호, 서민영, 안창민, 소화와 이지숙, 외서댁, 들몰댁 등 그들이 엮어내는 크고 작은 사건
들이 씨줄이 되고 날줄이 되어 태백산맥이라는 거대로 베로 짜여진 것이다. 그 베는 민중의
나날의 삶과 역사가 되어 완벽하게 조화되고 호응하여 일치한다.... (태백산맥 개요)

<벌교읍>
 소설속에서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철교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가서 돈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고 묘사하고 있다.

지도 왼편 윗쪽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살펴 보면 김범우의 집, 홍교, 소화다리(부용교), 벌교포구, 벌교 읍사무소, 벌교역, 진트재 등이 보인다.


<현부자집>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현부자집의 대문과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틀로 삼았으되 곳곳에 일본식(2층의 루, 마당 중앙정원, 2중 기와등)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꽤 흥미로운 건물이다.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며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김범우의 집>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김범우의 아버지)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인네.
눈 볽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겄는가. 맘 쓰지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1권 141쪽)'  벌교 횡갯다리(홍교)를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마을 산 등성이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벌교읍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조정래 작가는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랫채에
서 친구인 이집의 막내 아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대문을 끼고서 뒤로 돌아가다 보면 사람 키를 넘는 성벽같은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사랑채/안채/창고/아랫채등으로 이뤄져 있는 지라 당시 대지주의 가옥임을 알 수 있다.


<홍교-횡갯다리>
홍교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1728년(영조4년)
에 선암사의 초안 선사가 보시로
홍교를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 304로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철다리>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이 철다리는 소설의 배경이었던 시절은 물론
1970년대 후반 국도 2호선 도로가 선형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홍교, 소화다리와 함께
벌교 포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세 개의 교량가운데 하나였다.

 소설에서 염상구가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희한한 결투를 벌인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 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한다.
 
 
<벌교역>
 이곳 벌교는 조선시대 중엽 부사군에 속하였다가 후에 낙안군에 이속하였다. 벌교(筏橋)라
는 지명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뗏목을 엮어 다리를 놓아 건너 다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벌교역은 지역명을 따라 명명하였으며 1930년 보통역
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후로 1987년 지금의 역사를 준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6년간의 집필 태백산맥]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확인한,  줄거리 정리집, 취재수첩, 주인공들 기록장, 직접 그린 지리산 약도등을 보면 작가의 4년여에 걸친 준비기간 또한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작가 조정래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6년간에 걸쳐서 4부작으로 집필하였다. 집필하는 
기간동안의 취재수첩과 취재메모등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핵이었다. 때로는 수첩 한장이
소설 원고지 100~200장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빨치산 자료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작은
수첩하나는 수십권의 역사책에 해당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16,000매에 해당하는 육필 원고를 필사한 (왼편부터 아들,며느리,독자) 필사본을 보고선
방대한 집필 분량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태백산맥 지면속에서 그리게 되는 '벌교'와 직접 찾아다니며 확인한 '벌교'
오래도록 함께 결합되어 머리속에 각인될 듯 하다. 문학관에서 확인한 작가의 준비과정과
집필과정 속의 고통(작가는 집필이 너무 힘들어 몇번씩이나 펜을 놓을까 하다가 문익환 목사님의 구속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 연배에 저렇게 고생하는데... 하며 더욱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함)등을 접하면서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 마침내 보석같은 열매를 맺는
인간 '조정래'의 승리를 확인하는 수확도 거두게 된다.

('태백산맥'의 탁월함은 무엇보다 역사의식의 치열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조정래는 8.15 이후의 민족분단 과정과 6.25를 중심으로 하는 분단고착 과정을 밝히기 위해
현지답사와 탐문, 진실을 드러내려는 열정과 용기, 그리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우리 현대사
물줄기의 궤적을 제대로 그려내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역사에 올바르게 이어주고
있다)는 한 역사학자의 평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한다.

" 역사, 역사, 인간의 역사, 분단... "

"끝"
 
<태백산맥 시대 배경 이해 : 1948~1953 역사>
 - 1948.01 :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친미일변도 구성) 입국 
                 ← 소련/북한 이북 입국 반대

                남한 단독 선거 실시 결정(유엔 위원단 임무수행 가능 지역 한도)

- 1948.04 : 남한 단독 선거 반대 투쟁 격화
                " 3천만 동포에 눈물로 고함 " (김구성명 발표)
               제주 4.3 항쟁
              (3,000여명 무장/비무장, 5.10 단독 선거 저지/민족통일 쟁취)

               유격대 토벌 개시

- 1948.05 : 단독선거 실시,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8월 15일)
                제주 계엄령 선포(9월 유격대 공세 강화)
                북한 정부 수립(9월 9일)

- 1948.10 : 제주도내 학살 만연, 유격대 조직적 투쟁 약화
               여수 14연대 3,000여명 봉기 및 지리산 입산 (1957.4 최후 유격대원 생포)
               * 9년에 걸친 투쟁, 총 8만여명 희생자 발생

- 1949.01 : 반민특위 업무 개시 (이승만 반대속 찬성 103, 반대 6 통과)
- 1949.05 : 국회 프락치 사건 발생 (반민법 시행 강경론자 구속)
- 1949.06 : 친일 세력(무장경찰대) 반민특위  공격(이승만 지시, 특경대원등 체포)
               김구 암살(안두희 저격)

- 1949~50 : 유격투쟁의 전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 총 10만여명 희생

               지리산,태백산,호남/영남/제주도 유격전구

-1950.06 : 6.25 전쟁 발발 (38선 부근 847회 전투(남측주장), 1,836회 북침(북측주장))
              * 1948 분단후 자주통일 민족열망과 분단음모,
                 미국 전후 세계 전략의 소용돌이속

              전쟁 발발후 38선 격파 주장
              한강 인도교 폭파, 이승만 대전 피신(27일), 서울 장악(6월 28일)

- 1950.07 : 유엔군 참전(미국주도), 남한군 작전 지휘권 이양
               수원 점령, 조치원 방어선 함락, 대전 전투 패배
               (7월말 경상도외 남한전역점령)

               토지개혁 실시, 인민의용군 모집 응모(40만)

- 1950.09 : 인천 상륙작전, 남한 전역 재장악
- 1950.10 : 38선 돌파, 북한지역 계엄령 선포(이승만, 10월 10일)
               북한 전역 유엔군 장악
               토지개혁법 무효화(국유화된 토지 개인 매각 발표)

- 1950.11 : 북한군 반격, 유엔군 패주, 서울 재장악(중공군/북한군)
               38선 돌파(12월), 37도선 중심 긴장속 평온 유지
- 1951.01 : 유엔군 재반격, 서울 재탈환
               38선 중심 전선 형성

- 1951.04 : 맥아더 해임, 휴전 논의 전면 부각(미국)
                제한 전쟁 전략 전환(미국), 전선 교착상태

- 1951.07 :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최초 휴전 회담 개시
- 1952.02 : 세균전 문제 제기 (미공군 수행 : 포로 폭로)
               회담 교착, 미 군사압력 강화 (북한 13개 발전소 공습등)

- 1953.01 : 미공군 북한 관개용 저수지 폭격
               * 휴전협정 장기화 숨은 사유 ( 미 독점 자본 이익관련)
- 1953.07 : 휴전협정 체결 (전쟁 발발 3년 1개월여만)